QT나눔 20210210 누가복음 11장 49-5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2021.02.10 01:09
누가복음 11장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는 쉽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화평케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예언한 것이 분명한 이사야 9장 6절 말씀은 그를 "평강의 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지만 '평강의 왕'이란 유명한 예수님의 별명은, 성경에는 여기에 밖에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설명하는데 그 곳에서 멜기세덱을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브리서 7장 2절)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장 14-15절)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사도행전 10장 36절)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는 화평을 주러 세상에 왔노라"라고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왠지 있음직한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충격적이지만 예수님께서 그것과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 헉... 이 내용은 읽을 때 마다 그냥 넘기고 싶은 말씀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늘 낯설게 느껴지는 본문입니다. 오늘은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바르게 깨닫도록 도와주세요-
잠깐 화평과 분쟁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고 오늘 본문의 처음(49절)으로 돌아가면, 예수님께서는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불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또한 해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정확히 어떠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통적인 ‘불’의 이미지는 '심판'의 이미지 입니다. 사실 '심판'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땅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역시 심판하러 오셨고 또 오실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되어 나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좀더 긍정적인 이미지로는 '복음' '생명' '사랑' '진리' 등으로 해석해 보더라도 역시 틀린 이야기가 아닌 것 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불'을 일으키셨고, 역사적으로도 증명 되었듯이 이 불길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불의 이미지로서 '성령'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신 성령의 불은 이 땅에서 놀랍게 타올랐고 앞으로도 타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아니면 위에 설명한 모든 의미를 다 담고 있는 말씀이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을 던지러 오신 그 목적을 위해 받아야 할 세례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계십니다.(50절) 그 세례는 다른 해석의 여지 없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여집니다.
백과사전을 보면 '불'은 산소와 물질이 화합하여 ‘연소’하는 현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소'에는 3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첫 번째 요소는 연료(타는 물질)이고 두 번째 요소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이며 마지막으로 일정량 이상의 산소가 있어야만 연소가 일어납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연소 [combustion, 燃燒] (두산백과)
예수님께서 던지신 불 역시 타는 물질이 필요할 것입니다. 또한 이 물질에 불이 붙기 위해서는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필요한데, 예수님께서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49절)라고 하신 말씀이 제겐 이 '발화점' 이상의 온도라는 조건을 갖추었다면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되는 데에 바로 세례(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이 이루어 질 예비된 날을 예수님께서는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던지신 ‘불’은 연료(타는 물질)인 그 누군가에 옮겨 붙어 타오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불이란 것은 원래 태워서 없애고, 주변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불이 붙은 그 누군가는 자신을 태워 없애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나, 나, 나. 어쩌면 우상으로 섬기고 있던 그 나 자신을 태워 없애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해 불은 빛과 열을 내며 타오릅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주변의 누군가를 다시 뜨겁게 만들고 결국 그 불은 번져 나갑니다.
발화점에 가까운 온도에도 자신을 사르지 않으려 버티는 저항은 있게 마련입니다. 냉랭한 마음과 냉소적인 태도들은 불이 자신에게 번져오는 것에 저항합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이 치열함은 마치 전쟁과 같습니다. 저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51절)라는, 예수님께서 직접 말하신 이 충격적인 말은, 이 불이 번져가는 그 경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 '전쟁'을 묘사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의 불로 타오르는 자와 그것을 저항하고, 싫어하는 냉랭한 자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의 전선(戰線)은 어디든 그어질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곳이 한 가정 안이라고 할 지라도 말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불이 붙은 세 사람과 냉랭한 두 사람, 불이 붙은 두 사람과 냉랭한 세 사람 사이에 이 치열한 전쟁은 벌어지게 됩니다. 그 것이 비록 아버지가 아들,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과, 딸과 어머니와, 시어머니와 며느리와,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도 말입니다.(53절)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이것과 유사한, 가족마저도 산산히 깨뜨리고 분열시키는 전선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바로 '이념'과 '이단'에서 말입니다.(정갑신 목사님의 설교영상20200222 emb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 누가복음 12장49~59 참고) 이념과 이단이 만드는 경계선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싸우고, 분열하고, 다투고, 죽이고, 고발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쟁의 현상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에 의한 분쟁과 이 '이념'과 '이단'이 벌이는 분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싸움의 방법입니다. '이념'과 '이단'의 싸움은 칼로 상대를 베는 싸움이지만 위에서 말했듯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에 의한 분쟁은 십자가로 자신을 못박는 싸움입니다. 자신을 태우는 불입니다. 이념과 이단은 원수를 원수로 복수에 복수라는 영원한 죽음을 향하지만 예수님께서 던져 주신 불은 자신을 못박음으로 전쟁을 끝내고 그 생명의 불을 옆 사람에게 번지게 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 세상 속에서 끝없는 싸움과 비난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자신을 못박음으로 전쟁을 끝내는 불이 아니라 바로 '이단'과 '이념'의 방법으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히 우리를 건드려? 우리 세를 보여줘!! 라고 달려드는 방식은 예수님께서 싸우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태워 없애시고 주변 사람에게 그 불이 옮겨 붙게 하시는 싸움의 방식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우리는 그러한 싸움의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말이 좋지 너무나 하기 싫은 일입니다. 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를 태워 없애는 것은 더더욱 하기 싫은 일입니다. '나'를, '나의 가족'을, '내가 사랑하는 것'을 공격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끝까지 응징하고 배를 더해 갚아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입니다. 사실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불타고 있지 않으니, 내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서 불이 붙을 만한 발화점 이상의 뜨거운 온도는 커녕 온기조차 느끼지 못합니다. 불이 일어나지 않으니 전쟁이 일어나는 치열한 전선조차 없습니다. 단지 '이단'과 '이념'에서 보이는 바로 그 개싸움만이 내 가족 안에서, 내 주변에서, 내 교회와 세상속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 시대를 분간하라고 하십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56-57절) 마지막 비유 역시 이해가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오늘의 본문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준비하라!"라는 종말을 준비하라 하신 것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종말’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승천하여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날을 묘사하고 계신 것일 것입니다. 그 날에 법관이신 그 분 앞에 서게 되기 전에 ‘화해’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던져 주신 그 불에 자신을 불살라,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제자의 삶을 살기를 결국 거부한 냉랭한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까지 나오지 못하는 옥에 갇히는 날이 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틀릴 수 있지만...
조국 교회는 성경의 주인공, 말씀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로마서 10:17)이라고 했고 "모든 구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딤후 3:16)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도 강조했는데도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것 같은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을 박제화시켜 "우리 구주 예수님" "우리는 모태부터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만을 녹음기처럼 반복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위선죄를 공격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라는 잔혹한 형벌을 받으셨던 하나님의 아들을 알리지 않습니다. 솔직히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11장에서 자신을 초청한 바리새인 앞에서 그들의 위선을 사정 없이 꾸짖으셨습니다. 6 달 동안 들었던 "헷세드" 사랑의 설명과 완전히 다릅니다. "에그머니나! 이건 뭐야??" 라는 말이 나오게 될 정도로 저들의 위선을 무섭게 고발했습니다. 하나님(=예수님)은 그렇게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꽉 찬 (=장성한 분량) 사람이 되어 이런 예수님을 닮으라고 에베소서 4장에서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헷세드"사랑으로 쓸개 빠진 사람처럼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11장은 이렇게 끝납니다.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뜩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12장은 11장에서 "위선자"에 대한 고발이 계속 되는데 여기서 "불"은 이들에 대한 고발/심판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불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는데 그런 분란이 바로 불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심판/고발에 대해서 찬성/반대 입장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현재 조국 교회에서 흔하게 보듯이 중간 지대는 없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위선을 고발할 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15절 이하에서 그들의 종교적인 위선 밑에는 "돈 욕심"이 깔려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에도 이 말씀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이 얼마나 위선을 혐오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이 그들과 차별 되게 살라고 하시면서 (바로 새 사람으로 살라는 에베소서 4장의 주제!!!) 물질에 대한 태도까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면 구하라고 하셨고, 동시에 (예수님처럼!!!!!!) 천국 백성으로 남에게 베풀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속으로 검은 욕심을 가지고 남에게 존경 받으려고 이중적(위선적)으로 살지 말고, 제대로 하늘 나라에 투자하는 방법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주식투자 말아라, 아파트 사면 안 된다, 과외공부 시키면 안 된다 차별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 경쟁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와 같이 Karl Marx가 말한 계급 투쟁론에 기반한 권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점령국 로마를 미워하라는 이야기를 하셨을 법도 한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입장을 쉽게, 아무도 오해할 수 없게 표명히셨습니다 (이 말 역시 조국 교회 많은 설교자들이 인용하지 않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미워하는 세력이 결국에는 심판을 받을 것이고 그 이전에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하는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36~40). 왜 조국 교회에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 주는 설교자를 보기가 그리도 힘든 것일까요? 왜 힘든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는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예들이어서 금방 이해할 수 있는데, 왜 조국 교회 설교자들은 추상적인 말만 뱅뱅 돌릴까요?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을 다 알아 듣지 못해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하게 답 해 주셨습니다 (41~48). 남서울 교회 예배시간 설교에서도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나오고 설교자가 친절하게 답을 하는 광경이 자주 나오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면 이렇게 될 수 있는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불(=싸움) 붙이러 왔다고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듣고 위선에 대해 눈을 뜨고 나면 마음에 불이 붙어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선지자 하박국처럼 세상 불의 때문에 잠 자지 못하고 망대에 올라 기도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분노하는 마음이 되어 마태복음 23장을 읽고 또 읽게 됩니다. 하박국 3장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많은 조국 교회의 설교자들은 누가가 쉽게 적어 놓은 이런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성경을 해석해서 누가가 전하려고 한 예수님을 듣는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지적한 위선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심각한지를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그 시절에도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을 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56절에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무리 속에서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던 바리새인, 율법학자, 제사장들을 향해서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왜, 이 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고 날카롭게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이 10~12장에서 해 주신 말씀 정도라면 그들은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회개해야 했겠지만, 그들은 그대신 그들의 검은 욕심을 따라 종교를 그들의 돈주머니 수단으로 알고, 하나님(=예수님)의 말을 면전에서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가는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 아파트 구입? 과외공부? 이런 것과는 비교불가의 어마어마한 범죄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탈을 쓰고 다른 사람 위에서 군림하면서 각종 선한 일을 도맡아 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돈을 챙기는 사악한 무리였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알고도 모르는 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죽일 때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정말 구제 받을 수 없는 국가대표급 죄인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 교회는 왠일인지 설명해 주지 않고 "차별하면 안 됩니다"를 되풀이 합니다)
제 생각에는 성경 말씀을 모른다고 고민하는 분은 절대로 외식하는 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런 분이야말로 전 재산 엽전 2푼을 바친 과부와 같고 예수님이 알아 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아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분이야말로 외식하는 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3장에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그래서 남에게 존경 받으려고 하는) 시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을 잘못 가르치면 그 책임 아주 아주 크다고 경고하면서 아무나 가르치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조국 교회의 많은 선생님들은 야고보 사도의 경고나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혹은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알맹이 없는) 메시지를 양산하는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4~50분 들어도 예수님에 대한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 읽는데 10분이 걸리지 않는 에베소서 내용과 너무 너무 대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온통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스데반 집사처럼) 예수님으로 꽉찬 그런 설교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조국 교회의 문제는 믿는 사람이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알리지 않고 계속해서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예: 차별하면 안 됩니다, 주식투자 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됩니다, 과외공부 시키면 안 됩니다, ....)를 가르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행동이 결과 되는데 잘못된 결과를 놓고 문제의 원인이라는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아 열이 나고 설사 하시네요...그게 문제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웃어야 하는데...
오늘도 많은 설교자들은 성경에 나온 예수님을 알리는 대신 지속적으로 Karl Marx가 200년 전에 가르친 대로 자본주의 제도를 공격하고 빈부격차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강조하며 사회적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은 믿는 사람들의 행위가 교회가 욕먹는 원인이라고 공격하지만, 성경은 제대로 믿으면 행위가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갈라디아 5장, 야고보서, 요한복음 15장, 히브리서 11장)라고 한결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스스로 구제 받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변할 수 없다고 반복해서 알려 주지만, Karl Marx의 영향을 받은 설교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언급 없이 우리 행위가 문제라고만 지적하면서, 우리의 어떤 행위가 문제고 그 문제가 왜 생겼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온 예수님의 설명은 간단명료합니다. 위선을 싫어 하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위선자들은 세상에서 두려운 세력을 만들고 너희를 위협하겠고 그들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산다. 하지만 심판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너희는 천국백성으로 나처럼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주식투자, 아파트 구입, 과외공부 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나눠주고 살아라. 그게 천국을 위한 진정한 투자! 내가 이렇게 설명하는데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나를 죽이려는 세력은 결국 심판 받을 것이고 (성령을 모독한 죄로!) 그들의 (돈을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으려는) 위선을 나는 혐오하고 혐오한다. 하나님이 바로 코 앞에서 말해 주는데도 그들은 말씀을 거부하고 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 독자들은 이 사건을 보고 깨닫기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그들 죄인들에게도 여전히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비유를 들려 주셨다...
이런 하나님이야말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아니신가요?
12:50 내가 받을 세례란? 십자가에서의 죽음.... 원래 세례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 에베소서에서 나온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났다" 와 유사한 의미로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시는 과정인데 그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그 고통을 지셨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오늘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조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