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좋은 전통 중 하나는 봉헌기도 때 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아멘!”(216장 마지막 절) 저는 가끔 앞에다 ‘억(億)’자를 넣어서 불러봅니다. “억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제가 누려왔고 누리고 있는 은혜가 만 가지가 훨씬 넘을 것 같아서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최근에 제가 깨달은 다소 당혹스러운 감사의 제목들을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고아권익연대’를 조직하여 고아 출신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계시는 조윤환 대표께서 방송사 인터뷰에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앵커의 질문에 ‘버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대답하는 말을 듣고 그야말로 충격이 되었습니다. 버리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아픔을 품고 살아온 분의 고백이어서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만약 우리 형제를 버리고 떠나셨더라면 비난은 들었겠지만,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라고 동정받을 만한 형편이었습니다. 개인사이긴 합니다만, 제가 다섯 살이고 동생의 돌날 아버지께서 중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시부모님을 모신 채 저희 5남매를 키우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키워주신 어머니의 그 사랑을 몇만 가지 은혜라
고 계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충격적인 경험은, 얼마 전 중학교 동창의 모친상 부고가 와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50년 만에 처음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 친구 집은 다소 여유가 있어서 그 어머니께서 학부모 육성회 간부를 하셨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저의 형편이 어려우니 좀 챙겨주시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배경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친구와 친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그 집에 숙식하고 민폐를 끼치며 중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저 좋은 분들이고 제가 공부를 조금 잘하니까 같이 있는 걸 좋아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저는 많은 분의 도움과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고는 생각했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기 위해 도처에 은혜의 그물(?)을 쳐두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제가 알지 못하거나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는 은혜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
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편 22:10)라고한 다윗의 고백에 저도 “아멘!” 하게 됩니다.
제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는데, 구원의 확신을 주신 말씀은 에스겔 16장이었습니다. 저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럽지만, 제가 태어날 때부터 저를 돌보고 입히고 먹이고 온갖 좋은 것들로 채우시며 키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만은 결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누리는 기쁨은 또 얼마나 큰지요! 서로 반가워하며 즐거워하고, 여러 섬김을 받으며 교제하고 또 서로를 세워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 때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감사(感謝)’라고 하신 목사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에, 우리 생각에 떠오르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누려왔음을 각자 확인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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