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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이야기 목사도 못된 행운아
2017.09.22 13:49
목사도 못된 행운아
내가 순천을 떠날 무렵, ‘오우현은 신 장로 사위라네’.... 짓궃진 교회 친구들이 놀려댔다. 그러나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진학 차 떠나기 전 날 밤에 김양과 박 양이 초청하기에 갔더니 조촐한 다과상을 차려놓고 “오선생님, 신은정이 꼭 선생님을 오빠로 삼게 해달라고 심심부탁 했어요.” 라고 졸라댄다. 그러나 시원한 대답 없이 나와 버렸다.
영영 그 집을 떠나는 날 신은정이 책을 두 권 포장하여 내밀 기에 무심히 받아가지고 기차에 올랐다..대학공부를 하러 상경하는 심신이 왜 그리도 무거운지! 신은정이 선물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점원생활에 지치고 고학에 지쳐 소설 한 권 읽어보지 못한 나는 그 책을 문학탐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 주는 대체적인 연애글로만 이해했다. 그렇게 문학에 어두운 내게 휴머니즘이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480개의 남산 계단을 올라가 강의실에 들어갔다. 첫 시간에 심 경생 교수가 들어와 영어책을 펼쳤다. 교수의 막대같이 가는 체구와 얼굴에 냉기가 돌았다. 영어교재를 들고“누가 해석하겠습니까” 묻자 여러 사람이 손을 드는데 해석을 하는 실력들에 나는 기가 죽었다. 그 교실에서 머리가 거의 홀랑 벗어진 도 양술 목사로부터 철학개론을 강의하는 것을 들으면서 인상 깊은 것은 “그것도 해결 못하고 신학교 왔소?”라며 “교수님,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에댄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놓고 인류의 조상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학생에게 분필을 내 던지는 것이었다.
6•25 흉상들이 도시처처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고, 국민의 심신이 안정이 안된 전후여서인지 채플시간 설교를 하면서 김 치선 박사는 눈물이 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별명을 붙여드렸다.
수강을 시작한지 며칠도 안 되어 아무래도 신은정이 선물한 책이 부담이 되어그 책을 수피아여고 기숙사로 편지와 함께 우송해버렸다. 앞날을 예견 못하는 서툰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며칠 후 신 은정으로부터 답이 왔는데 그 문학소녀의 우는 모습과 화난 모습이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될 대로 되라’ 운명의 바람이 부는 대로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음 날, 그의 마음을 달래며 나의 모든 것 포기하기로 하고 광주로 내려가 그 학교 기숙사로 심부름꾼을 보내 만나자고 했으나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때는 얼마의 대기시간을 둬야 하는 지혜도 필요했건만 조급한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날 밤, 순천의 친구 집에 가서 밤을 새우고 안개 낀 아침을 맞는데 그의 어머니 임 예정 권사가 나를 불렀다. 그가 왈“자네의 불신앙의 가정환경으로 봐서 절대 내 딸을 자네에게 줄 수는 없네”라고 하잖는가. 고개 숙여 할 말을 못 하고 나는 친구 집에 가서 베개가 다 젖도록 울었다.그것은 신은정과 인연을 못 맺어서가 아니고 너무 정이 들어버린 그의 어머니로부터 정나미 떨어지는 반대급부의 말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구러 그 집과 인연은 안 되었어도 그분이 서울에서 작고할 때까지 내 경차에 노권사와 같이 그 분을 모시고 야외나들이를 시켜 들일 때 그렇게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탈한 몸으로 다시 상경하여 수강을 하고 있으나 안정을 잃어버렸고, 2학년의 등록금준비가 안 되어 더욱 근심이 가중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오후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노점장사를 시작하였다. 오가는 수만 명의 틈바구니에서 학우를 만난다던지 고향사람을 만나게 되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노점상 중에는 깡패 조직들도 있어서 자기들 손님을 내가 유도했다는 억지 핑계로 나에게 성경적인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 방학이 되어 다 환고향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어서 기숙사 지기를 하며 손수레차를 만들어 과자장사를 해보았으나 팔리지 않아 과자봉지마다 여름습기에 구덕이가 실어 다 버리다 싶이 했다.
방학 동안에 낮에는 시장에서 노점장사, 해지면 삼각산에 올라가 밤중까지 기도를 하다가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아무리 기도를 했지만 그때는 하나님께서 내가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기적 같은 상황을 이루어 주시지 않았다.그렇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교회는 남대문교회를 꾸준히 출석하며 박태준선생 지휘하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했다.어느 주일 날, 고 배 명준 목사님께서 악수를 놓지 않은 채 “오 선생, 고생 하시지요? 고등학교 2학년 학생 집에서 가정교사를 맡아보겠소?”라며 만면의 웃음을 띄우셨다. 그 당시는 가정교사의 실력만 있으면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도 해결되고 좋은 배우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내가 그네들로부터 배워야 할 실력임을 알기에 “목사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추후에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더 갈 수가 없었다.
50년대 우리 대학 기숙사는 회현동 숲 속에 있었다 방학때면 난 갈 곳이 없어 기숙사지기로 남아 장사를 했다. 그때는 남산이 개발이 안 된 때여서 남산을 오르려면 구불구불 산길이 험했다. 그런데도 무더운 여름 어느날, 밤 담요를 들고 산상기도차 남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 열발짝 뒤에서 응,응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퍼떡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성경말씀(눅10:25-37)이 생각났다.뒤돌아서 10보정도 후진하고 들으니 칠흙같은 어두운 밤 숲 속에서 고교생 정도인 한 청년은 서있고, 비숫한 다른 청년은 누운 채 끙끙 알고 있었다. 웬 일이냐고 사연을 물으니 취중에 낭떠러지에서 추락하여 더 움직일 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무조건 부상자를 업었고 한 청년은 담요를 들고 내뒤를 따랐다. 남산의 광장을 지나 후암동쪽 층층대를 내려가야 하는데 축처진 환자의 무개가 너무 심했다. 등에서는 술냄새가 진동하고 알른 소리가 대단했다. 한 병원에 갔더니 외과 병원으로 가라며 받아주지를 않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외과병원에 가서 침대에 눞이고 의사에게 내가 학교 기숙사에 가서 치료비를 가지고 오는 동안 치료를 부탁했다.기숙사에 가서 주머니를 뒤저보니 의사의 요구대로 줄 돈은 못되지만 있는 대로 현금 전부를 털어서 가지고 그 병원엘 갔는데 맙소사! 두 청년은 임시치료를 받고 의사의 허락도 없이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환자를 업고간 고학도인 내 몰골이나 그 환자들 모습에서 장기치료의 희망이 없어보여 적당한 치료로 의사가 나가도록 권고 아니면 그들 자신이 도망쳤던지 양단간에 하나일 것이라 생각하니 허털하기 그지없었다. 가지고 간 내 믿천을 병원에 지불하고 돌왓왔다. 치료비를 받고난 의사는 그 환자는 간에 큰 손상이 갔다고 후담을 남겼다. 그들은 이세상에 살아있으까 죽었을 까. 내기도방석인 담요까지 가지고 가버린 자들.....
1957년도에 창경궁에서 반공전람회가 열렸다. 나는 두 학우를 꼬드겨 마침 11월 8일 오후에 휴강시간을 이용하여 추풍에 낙엽을 밟으며 세 사람이 나란히 창경궁엘 들어가던 찰라, 씩씩해 보이는 최호대령이 입장 자들을 세는 듯 하더니 갑자기 내 오른 손을 잡아 추겨들고 100만 번! 소리 지르지 않는가. 나도 깜짝 놀라 안으로 발을 옮기면서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이어 여러 여군들이 나와 곷 다발을 들려주는가 하면 화환을 목에 걸어주었다. 포장된 기념품도 받았다. 특히 크리스쳔인 김계원 준장이 반겼고 미 장성들도 악수를 청해왔다. 많은 기자들 중에 육군본부기자들이 나와 잠깐 인터뷰를 하고 감상문을 써달라고 청해왔다. 창경궁 안에 별당마다 장교들이 행운아에게 전람회를 설명해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 안내자의 해설을 들으며 관람을 했다. 일제식민시대의 독립운동과 6•25전쟁 동안에 생긴 사건과 노획물들을 전시, 또는 데커레이션을 잘 해놓았다. 전람회 목적대로 그 모든 것이 반공사상을 유발할 수밖에 없도록 해놓았다. 친절한 안내를 받는 동안 “본 전람회의 주인공 행운아는 용산구 도원동에서 기숙하며 장노회 신학생인 오우현 씨가 되었습니다.”라는 방송이 연이어지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다음 “오늘 행운아에 대해서 이 대통령께서 ‘비행기 펴레이드를 하라’고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름이 많은 기상하에서는 좀 어려우니 다른 방법으로 지상퍼레이드를 했으면 하는데 당사자의 생각은 어떠신지요”라고 묻기에 “주최 측의 방안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했다. 이윽고 꽃차 3대에 장교들과 여군들과 행운아가 그 차를 타고 종로와 남산의 오름길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장교들은 남산의 우리 대학 학장인 박 형룡 박사에게 까지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다음 그 꽃차는 유유히 남산을 미끄러저 내려갔다.
그 행사로 인하여 이 고학생이 파란 하늘길만 보고 가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도 가져보았으나 그 무거운 굴레는 여전했다. ‘행운이란 노력 없이 얻어진 요행스러운 것이기에 보전성이 없다’라는 안병욱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육군본부 기자단에서 주문한 감상문을 작성하였으나 문장력에 자신이 없어서 국문학교수인 윤 영춘 선생 집을 찾아가 원고지를 내놓으며 “교수님, 이 감상문을 교정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부탁하고 나온 후 두 번이나 찾아가보았으나 내가 놓고 온 그대로였다.지금 생각해보면 교정, 교열, 윤문 등은 문장 중 약간의 미흡한 점이 있을 때의 일이라고 늦게야 알게 되었다. 얼마나 엉터리 글이었으면 이러구러 말 한마디 없이 원고지를 그냥 가져가는 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싶었다. 결국 소감문을 제출 못하고 말았다. 그때 나같이 짜집기 식 공부를 한자의 현 주소임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수십 년간 설교는 많이 들어 이론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대단했다 60대부터 논픽션을 쓰기 시작하여 남서울교회 청년부 중에 국문학출신인 임양에게 그 원고를 검토해 달라고 했더니 그 임양 역시 글에 대한 평보다는 ‘장노님의 삶의 모습을 알게 되어 기쁘다’라는 우회적 대답만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윤 영춘 교수와 똑 같은 평을 했으리라 생각되었다. 미련 한자가 용감하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다.아마도 60대 말에 박주윤 권사로부터 마춤법 띄어쓰기 등 많은 도움을 받아 지금도 그 권사님이 고맙기만 하다
다시 이야기를 소급해보자 반공전람회에서 행운아가 되고 보니 이전보다 허탈감만 생겨 기가 죽어 가는데 며칠 후에 축하편지 한통을 우편함에서 발견했다. 내 평생 여자로부터 처음 받아보는 편지! 더구나 생활 무대가 이색적인 여군으로부터! 그는 육군본부 인사과에 근무하는 여군중사로 반공전람회의 안내담당여군인 중 한 크리스쳔이었다. 필재조차 나쁜 나에게는 그의 달필과 글의 짜임새가 너무 좋았다. 같은 교인으로서 신학생이 행운아로 명명을 받은데 대하여 기쁨에 넘쳐 축하의 편지를 썼다며 축하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보고 싶었다. 다음날 창경궁을 가서 동료 여군들에게 물어보니 지방 출장이라고 해서 서운한 발걸음으로 뒤돌아섰다.
12월이 되어 방학으로 모든 학우들이 환고향하고, 나홀로 남아 남대문 시장을 떠날 수가 없어 양말장사를 계속하고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경제 형편상 2학년 진학이 어려울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짜집기 식 공부한 실력으로 도저히 목사가 될 만한 실력자가 되기는 틀린 것 같았다. 날마다 교통순경의 단속에 시달리는 것도 고통이었다. 어느 하루는 교통순경들이 노점장사들을 모조리 남대문 파출소로 몰아갔다. 날더러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 주간이 병역 기피자 단속주간으로 각 경찰들에게 활당 제로 병역 기피자를 물색하는 중에 나도 걸려든 것이다. 입대해당의 연령자라도 고등학생에개 입대연기를 해 줬는데 나는 미처 서울로 병적이동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피자로 단정 받고 파출소에서 잡아들인 모든 대학생들과 같이 나도 이태원에 있는 육관구로 이첩되었다. 그곳에서 하루 밤을 새고 나니 건사한 도시락을 나누어주었다. 식사 후에 해병장교들이 대열에 서있는 장정 중에서 자기들 마음에 드는 학생들만 골라 세우더니 급기야는 진해 해병교육단으로 수용시켜버리지 않는가. 거기서 삭발을 당했다. 11중대 소속으로 편성되어 신병훈련 중인데 외롭고 쓸쓸한 중에 지 영숙 여군에게 입대를 알렸고 그는 군선배로서 내가 그 어려운 훈련을 잘 겨뎌낼 수 있도록 편지를 보내주어서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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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영
2017.09.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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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현
2017.09.23 12:19
오우현 ; 댓글에 대한 답
본교회에서 가방끈이제일 짧은 사람의 글을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도권 학교 공부를 짜집기 식으로 한 사람이여서 퇴임후 문학단체에 등단하여 소설과 수필을 쓰게 된 것이 글쓰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많이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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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영
2017.09.23 17:15
가방끈은 짧으신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경험과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은혜와 감동의 여운은 참 길고도 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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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현
2017.09.23 18:36
오우현
바쁘신데 또 댓글을 주셔서 글 쓰고 싶은 욕구가 더 생김니다.제가 파킨슨 병이 아니어서 잘걸을 수만 잇다면 이미지화해서 독자들이 재미있게읽을 수 있게 하고 싶은데 제 형혀편이 그렇습니다. 목사가 못된 행운아에 "사마리아인을 만난 강도사건과 똑 같은 사건을 제가 경험했기에 2시간 전에 추가했습니다. 창경궁 반공전람회 바로 전에 그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교회 교우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각인시키고 싶은 글) 를 찾아보시면 저에 대해 더 아실 수 있습니다.
요람에서 장집사님 얼굴을 확인하고 더 감사합니다. 교회에서 저를 보시면 소개좀 해주십시오
저는 소설가협회에 등단하고 한국에서 유일한 월간 수필문학에도 등단하여 글을 쓰다가 파킨슨 환자가 된 후 거의 절필하다싶이 되었습니다.8권의 저술과 문학상은 두 번 받았습니다.자랑같아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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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영
2017.09.23 21:44
그러시군요^^
이제서야 장로님을 알게된게 아쉽지만,
또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틈나는대로 장로님 글 읽으며 삶의 지표로 삼겠습니다.
감사드리고, 장로님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생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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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현
2017.09.23 22:16
또 주신 댓글 확인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참 어려운 시절을 사셨습니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