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나눔 20210205 매일성경 누가복음 11장 27-36절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2021.02.05 00:22
누가복음 11장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말을 하게 하시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으며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를 의심하고, 증거를 보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서 크게 외칩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높임으로써 예수님을 높이는 칭찬의 방법일 것입니다. 마치 훌륭한 학생에게 "너희 어머니는 참 좋겠다...너 같은 아들(딸)을 두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겠지요. 하지만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예수님께서는 굳이 그 말을 수정해주십니다. "그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단다"(28절). 예수님께서 겸손함을 보이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겸손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경우가 오히려 많습니다. 31절의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라는 말씀에는 겸손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죠. 죄인된 인간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자신을 바로 아는 데서 나오는 반드시 갖춰야 하는 덕목이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겸손'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한다고 하십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왜 악한 세대임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은 또 무엇일까요? 요나가 니느웨에서 우리가 모르는 어떠한 표적을 보였을까요?? 요나에게 일어난 기적 중에 알려진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물속에 던져졌을 때에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온 것일 것입니다.(요나 1장 17절)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40절)라는 해설을 덧붙여 해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이 이 유명한 일화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30절에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에게 표적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믿고, 회개한 것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바닷물속에 요나를 던졌던 배에 탔던 그 사람들이라면 그 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지 못했고 요나가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구구 절절이 말하고 다녔을 것 같지 않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행한 사역은 요나 3장 4절에 단 한 문장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밖에 없습니다. 며칠도 아니고 단 하루 동안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라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요나의 그간의 행태와 하기 싫어했던 마음으로 보았을 때 그것 마저도 열심히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방 여왕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이는 솔로몬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인 스바(시바)의 여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왔다고 합니다. 사실 열왕기상 10장을 보면 여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1절)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험하러 왔다고 하지만 시바의 여왕은 솔로몬이, 특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고, 관심을 가졌고, 궁금해했고,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심판 때에 이 남방 여왕, 시바의 여왕이 "표적을 보였음에도 믿지 않았던 자"인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 이야기 하십니다.(31절) 예수님께서는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로 돌아가(32절) 심판 때에 이 니느웨 사람들도 시바의 여왕과 같이 "표적을 보였음에도 믿지 않았던 자"인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설득당하거나 어떤 이적, 기적을 보여주어서 믿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멀리 서부터 들리는 소문으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느닷없이 도심에 나타나 밑도 끝도 없이 큰 성읍이 40일 만에 무너진다고 떠드는 한 사람의 말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사실 역시 공통점입니다.
이어서 하시는 '등불'의 비유는 다소 어렵습니다. 마치 불가의 '선문답'같이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등불'과 '몸'과 '눈' 그리고 (등불이 아닌) '속에 있는 빛' 이 나옵니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뚜렷한 비유가 아니라 좀 어렵습니다.
'등불'은 어디 안 보이는 데다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는 특징을 설명하십니다.(33절) 그렇게 함으로써 들어가는 모든 자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말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등경위에서 이미 밝게 빛나고, 들어가는 모든 자들이 그 빛을 볼 수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몸'의 특징은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다고 설명하십니다.(34절) 그리고 그 '몸'의 밝음을 결정하는 등불은 '눈'이라고 하십니다. '눈'이 좋고 나쁨으로 '몸'이 밝을 수도 어두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져가면 '네 속에 있는 빛'은 '몸'의 빛이며 이는 몸의 등불인 '눈'으로 귀결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라는 35절 말씀은 결국 "네 '눈'이 성한지 나쁜지 보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조금은 논리적 비약이 있지만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36절)이란 말의 뜻은 "네 눈이 성하고 조금도 나쁘지 않으면(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으면, 등불이 안 보이는 데가 있지 않으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보는 눈'이 있다면 등불의 빛이 비출 때에 온전히 밝을 수 있다는 말로 저는 이해가 됩니다.
앞의 시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쉽게 그냥 넘길 수 있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을 찾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는 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는 눈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일으키며, 진리를 선포하여도 더 더 더 화끈한 표적을 보여 달라 요구합니다. 믿을 수 없다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표적을 구하는 세대는 악한것입니다.(29절)
나의 휴대폰을 열면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을 보고 듣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표적을 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왜.... 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도저히 변하지 않는 나의 삶에서 한 방의 큰 이적과 표적이 내 삶을 바꿔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내가 예수님 시대에 살아서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 하더라도 내가 표적을 구하는 자 중에 서 있을지, 아님 그를 밴 태와 그를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외치며 그를 따르는 자 중에 서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주실 것은 다 주셨습니다. 더 이상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더 이상의 믿을 거리를 달라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눈이 어두운 곳이 없는지, 고장 나진 않았는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초점이 안 맞는 것은 아닌지 보아야겠습니다. 오로지 주님 예수님만 바라보고 초점을 맞추고 그가 비추는 밝은 빛이 나를 비출 때에 온전히 함께 빛이나는 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놀랍게도 조국 교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리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입장을 제대로 전해주는 강해설교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죽을뻔 했는데 엘리사와 엘리야 시대에 이방인들은 믿었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10장에서도 똑 같은 지적을 하십니다. 누가는 이방인을 위해서 누가 복음을 썼는데 이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이상했기 때문에 누가 복음에 이 장면을 남겨 놓았던 것 같습니다. 요나 시대에 니느웨 백성들은 회개하고 믿었는데, 솔로몬 시대에 시바 여왕은 믿었는데 정작 그 시대에 살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솔로몬(예수님은 솔로몬의 후손이기도 하십니다)보다 더 큰 예수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으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빛을 받은 우리는 다시 세상의 빛이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빛을 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둠에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면서, 우리가 예수님 가운데 있는지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요한복음 15장에 나온 "내 안에 거하라" 그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가지로 붙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강조한 것처럼 예수님에게 촛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예수님 아래 복종시키기로 창세 전에 계획하셨다고 에베소서에서 설명했습니다. 또히브리서 12장에 나온 것처럼 "믿음의 주여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면 됩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조국 교회는 예수님의 이런 간단한 그리고 간곡한 부탁을 계속 무시합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개월 몇 년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무슨 영문에서인지 고장난 녹음기처럼 "차별하면 안 됩니다" "행함이 없어서 조국 사회에서 교회가 지탄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하는 이방인과 같이 되면 안 됩니다" "자본주의 경쟁에 상처 받은 사람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와 같이 예수님이 부탁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알리는데 전혀 관련 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경우 예수님을 알아 보는 "눈"에 문제가 있다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알아 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 속이 밝아진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한편 그날 예수님은 "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모인 사람들에게 험한 말을 하셔서, "행함이 없어서 조국 사회에서 욕 먹는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지 못하는 조국 교회의 많은 설교자들과 달리 그들이 왜 어떻게 믿음이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 어디를 살펴 보아도 두리뭉실하게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고, 매번 이렇게 너무 구체적이어서 상대방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상대방이 금방 알 수 있는 말로 말하셨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귀감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