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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18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9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21 경고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오늘 본문의 말씀이 단절이 된 독립적인 일화처럼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제 묵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 하자 혼자 산에 들어가시는 장면으로 오병이어 사건이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18절) 라고 시작되지요.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병이어 사건 직후 떡과 물고기를 원하며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몰려든 무리를 피해 혼자 산으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실 때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시간상으로 따로 떨어져 독립된 어떤 날인지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 열광과 환호가 깊어질수록 혼자 계실 장소를 찾으셨고, 그 곳에서 다른 것이 아닌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누가복음 5장에 예수님의 똑 같은 모습을 이미 본 바가 있습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기도하시는 예수님 주변으로 제자들이 찾아와 함께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무리들이 과연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 대답으로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옛 선지자중 하나가 살아났다고 하더라는 답을 합니다. 이 답은 매우 낯이 익습니다. 같은 9장 7-8절에도 똑 같은 말을 듣고 당황하는 분봉 왕 헤롯의 모습을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7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8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옛 선지자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도 함이라” 이를 보면 이런 표현은 예수님에 대한 당시 따르던 무리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자, 어쩌면 유행처럼 돌던 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물음의 대답은 베드로가 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20절) 마태복음에 그려진 베드로의 대답은 훨씬 자신있고 담대한 모습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장 16절)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메시아(masiah)”의 헬라식 음역(christos)이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로 기름을 부음으로 세워졌던 왕과 제사장등을 칭하는 말로 쓰였으나 여러 구약의 예언들이 한결같이 지목하고 있는 한 인물,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구세주’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당시 유대민중에게는 자기 민족을 속박에서 풀어줄 매우 강한 메시아 출현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이 소개되지 않고 바로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21절) 하지만 베드로의 대답이 만점 답안이었음은 마태복음 16장의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장 17절)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인정하게 하는 것은 ‘혈육’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영어 성경에는 fresh and blood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혈육’이란 우리말 표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피로 맺어진 가족, 가까운 사람, 민족 등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살과 피가 상징하는 육적인 방법(영적인 방법의 반대라는 의미에서의)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네게 알게 한 이”라는 표현으로 사람 또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기 때문에 전자의 의미로 쓰인 것처럼 느껴지긴 합니다. 어쨌든 저는 어떤 사람이 가르쳐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노력하여 공부하고 체험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 정도로 해석을 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부분에서 의미가 불명확한 “혈육이 아니요”라는 표현을 쓰셨는지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알게 하지 않으시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지식’으로만 할 수 있는 만점 짜리 답안이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베드로나 제자들이 그리스도라는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의 만점 답안 칭찬을 생략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 민족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는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해방하여 부강하게 만들어줄 왕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에게 줄을 잘 선 제자들은 앞으로 총리, 대신, 큰 자리 하나쯤은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인식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답을 듣고도 자신이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굳이 이어서 설명하시는 것이야 말로 제자들이 ‘모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받아야 함을, 죽임을 당해야 함을, 그리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함을 설명하십니다.(22절) 따르는 자들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23절)는 섬뜩하게 들릴, 한참 들뜨고 신나 있는 제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고 예수를 위해 목숨을 잃으면 살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24절) 생과 사가 엇갈리는 전쟁에서나 들을 만 한, 이순신 장군의 必生則死 必死則生 "필생즉사 필사즉생”의 말과 다를 바가 없는, 비장한 각오를 요구합니다.

아마 제자들 중 이러한 것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른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이제까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눈앞에 병든 자가 치유되고, 귀신들이 내쫓김을 당하는 기적들을 볼 수록,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이 산을 덮는 모습을 볼수록, 예수를 따르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더 영광스럽고 부귀해질 것인가만이 그려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장밋빛으로 그려온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암울한 반전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하셔야 하고, 그의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는 증거는 마태복음 16장 21-23절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만점 답안에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함을 알리자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항변하며’라는 표현에는 믿는 자에게 당하는 배신의 ‘분노’마저 느껴집니다.



나는 똑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오신 메시아라는 고백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점 짜리 답변입니다. 이 답변 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답변임을 날마다 ‘개독’ 같은 말로 하나님과 예수님, 성도와 교회를 모독하며 욕하는 자들을 보며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여전히, 예수를 믿어 잘되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된다” 그렇게 그게 아니라며 말씀을 듣고 깨닫고, 묵상을 하고, 때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폄하하며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마음속 한 귀퉁이에 여전히 자리잡은 “예수 믿으면 잘될거야”의 신화는 좀처럼 깨지지가 않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나 잘되게 해주시는 분"이라 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만약 잘 되지 않으면 언제든 예수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삶이 조금이라도 고통스럽고 힘들 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나를 배신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향한 발걸음을 언제든 끊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러지 않는 것은 아직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겉으로 나와 같은 모범 답안, 만점 짜리 답변을 말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나는 더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변화하였습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로비를 하던 제자들, 그리고 고난을 받아 죽는다는 말에 항변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살며 예수를 전하다, 예수를 위해 죽어갔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알고, 이해하고, 믿고 나서도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또 하나의 응원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예상과 다른 모습에 실망하며 좌절하며 때로 분노하고 항변하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 응원의 메시지 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 자신을 부인하는 삶, 죽고자 하면 살게 되는 삶, 핍박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삶과 같은 천성과 본능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너무나 힘든 시간은 사실 잠깐입니다. 이후 하나님 나라에서 보고 받게 될 영광의 영원한 시간과 비교하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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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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