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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장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흔히 변화산 사건이라 소개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라고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은, 그리고 너희 제자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뒤, 이어 하신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베드로의 만점 답안에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인자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제자된 자의 삶이 그들이 바라는 부귀영화가 아닌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예수를 부인하고 싶을 정도의 핍밥이 있는 삶이 될 것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묵상에서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응원과 희망을 주는 메세지라고 해석했습니다. 고통과 환란 핍박 가득한 삶이 계속 된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말씀대로 이 땅위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결국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말씀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변화산 사건을 의미한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 변화산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8일즈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시고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목적은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제 묵상에서 잠깐 이야기 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 열광과 환호가 자신을 휘몰아칠 때면 혼자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 가시는데 이번엔 제자 중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어제 묵상에서 모범답안을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답한 것에서 볼 수 있듯 늘 예수님의 수제자 역할을 담당했던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이자, 살로메를 어머니로 둔 형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십니다. 그야말로 ‘어부’들을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동업하던 어부였습니다.) 


 

이 세 명은 다른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예수님과 여러 사역에 함께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그 것이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서 였는지(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제자들 보다 특별한 재능이나 탁월한 이해력, 영성 등 무엇이 있어서 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4복음서에서 훌륭한 점보다 부족한 면이 더 많이 드러나는 제자들입니다.  


 

베드로는 늘 성급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앞뒤 재지 않고 바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여러 모습을 보입니다. 이전 묵상에서 살펴보았듯 예수님의 질문에 가장 먼저 답을 하는 적극성은 좋지만,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으셔야 한다는 말에 바로 항변하며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가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베드로입니다.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걷게 해달라며 앞뒤 안가리고 물위로 올라 걷지만 곧 두려움에 물속에 빠져버리고 마는 베드로 입니다. 발을 씻겨 주신다 하신 예수님께 그 의미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절대 그럴수 없다고 난리를 치다가 “그럼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란 주님의 말에 그럼 발뿐 아니라 손 머리까지 씻어 달라고 말하는 베드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을들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마을을 향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말하였다가 예수님께 꾸짖음을 당합니다. (읽어보면 믿기만 하면 자신들에게 하늘로 불이 내려 멸하게 하는 권세가 있음을 믿는 우직함도 느껴지긴 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 이란 이름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들은 또한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예수님께 찾아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마가복음10장 37절)이라고 이야기 하여서 다른 제자들의 공분을 사는 모습도 보입니다.  

 

 

성급하고 충동적이며 세속적이며 권력 지향적인 이 세 제자들을 데리시고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고 우리의 제자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깊이 졸고 있습니다(32절) 기도하시던 중에 예수님께서는 용모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옷은 희어져서 광채가 납니다. 졸다 깬 제자들은 변화된 예수님께서 영광가운데 두 사람과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들의 눈에는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로 보였습니다.(그들은 모세와 엘리야를 본 적이 없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요) 자다 깨긴 했지만 대화의 주제(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온전히 깨어났다(32절)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마 나중에 털어놓았을 때에 “졸다가 잘못 본 것 아니야?” 라는 반응을 많이 겪은 그들이 거듭 강조했던 말일 수도 있습니다.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긴 했지만 그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 비친 영광은 제정신으로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횡설수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누가복음의 평가 역시 그러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는 이 산에서 이 영광중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집을 짓고 살고 싶을 정도로 ‘좋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이들은 구름속에 덮입니다. 그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구름속에서 소리가 나는데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음성입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소리가 그치자 구름에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들의 눈에 오직 “예수”만이 보입니다.  


 

그 동안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것을 드러내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오늘의 변화산 사건에서는 예수님께서 따로 당부가 없음에도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이 변화산 사건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확하게 뚜렷하게 이 변화산 사건을 통해 ‘제게’ 말씀하고 계신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렴풋하게 저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 것 까지는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었던 제자들(그리고 우리들)을 더 성장시켜 가시는 과정의 하나로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던, 왕이 되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을 점점 깨닫아가면서 기뻐하고,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자신의 운명과 제자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기대했던 제자들에게는 청천 벽력과 같은 이야기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기대와 다른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제자들의 십자가짐, 핍박과 어려움이 함께하는 제자의 삶에도 불구하고 영광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과, 그로 인한 진정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바라보라는 말을 해 주셨습니다.(26,27절)  


 

그리고는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 변화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존재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모세같은 옛 선지자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인 분이심을 눈으로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용모가 변화하고 옷이 희어서 광채가 난다는(29절) 표현을 하면서도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답답할 그 무엇으로의 변화를 보여주셨을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하나님’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말입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그곳에 초가를 셋 짓고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그 영광 가운데에 거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에 싸입니다. 빽빽한 구름은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화 하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나온지 3개월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을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 때 백성들에게 보인 모습이 바로 산에 빽빽하게 들어선 구름이었습니다. (물론 나팔소리, 연기, 불과 같은 모습이 함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듯 제자들도 구름속에 들어가는 것을 무서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자에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가장 밝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출애굽기 19장 9절) 마치 이 말씀을 이루시듯이 구름속에서는 말씀이 들립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제자는 순서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경험하고, 영광가운데 있는 경험을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자신의 죄의 깊음을 보고 그로 인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게 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겪은 제자들은 변화를 겪습니다. 물론 넘겨짚어 추측하는 것이지만 늘 성미가 급해 생각나는대로 말부터 뱉어대는 베드로 , 충동적이이어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이 붙은, 늘 다른 제자보다 더 위에 올라서길 원하는 권력 지향적인 야고보와 요한이 다른 제자들이 겪지 못한 기사를 겪고도 아무에게도 이르지(자랑하지도,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자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라고 드러내는데 이용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때를 보고,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에겐 예수님과 만나는 ‘체험’이란 순간들을 맞닥뜨립니다. 기도 중에, 말씀 중에, 찬양 중에 찾아오셔서 그분의 ‘신성’과 ‘영광’의 자락을 보여주시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이 것은 신비한 종교적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한 하나님과 한 예수님을 믿는 ‘성도간의 교제’라는 모습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이 것을 느낄 때 저는 그 곳에만 머물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만 있고 싶고 죄를 짓게 되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교회 지체들만 만나고 세상 친구, 세상 사람들을 만나기 싫다고 느끼는 모습도 봅니다. 분명 이러한 경험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주신 귀한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 은혜의 산에서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을 알게 되어야 하고 또 명령을 받아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좋다고 끼리끼리만 모여, 우리 은혜만 우리끼리 나누고 우리 하나님의 영광만 우리끼리 알고, 죄짓지 않겠다고 세상과 담을 쌓아 산에만 머물려고 할 때  오히려 우리 안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무리로 전락해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도 물론 소중한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지 않으시면 할 수 없는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라고 말씀 하신 분 역시 예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체험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을 대면하는 것 역시 소중한 은혜이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만 머물러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체험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나의 죄를 발견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해 결국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제자된 자의 성장이며 갈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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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공지 [공지] 스마트폰>파일첨부 기능 추가되었습니다. [2] 2014.09.12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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