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용하고 계신 브라우저는 오래되었습니다.
알려진 보안 취약점이 존재하며, 새로운 웹사이트가 깨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최신 브라우저로 업데이트 하세요!
오늘 하루 이 창을 열지 않음
남서울 톡톡

누가복음 10장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8.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두 가지 큰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흔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알려진 예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관련된 일화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묻습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순수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주제는 '영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유대인들에게 '영생'의 개념은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유대인은 사후의 삶의 존재를 믿었다고는 하지만 '스올'이라는 정확히 정의되지 않은 어떤 곳에 간다는 정도였습니다. '사두개인'과 같이 사제직, 산헤드린과 같은 권력기관의 다수를 차지하는 지도층이면서도 '부활', '영생', '천사', '영혼' 을 믿지 않는 철저한 세속주의자들 역시 존재하였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단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신앙심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이 '어려운 질문', 그리고 '사두개인'과 같은 당시 지도층의 믿음에 대한 '정치적으로 예민한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하려는지 보기 위한 시험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지식과 함께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만점 짜리 답안을 내어 놓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라는 답안입니다. 이 답안이 만점 짜리 답안인 것은 예수님의 반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일화가 마태복음 22장 34절부터 나오는 큰 계명에 대한 문제와 같은 일화인지 아니면 독립된 다른 일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매우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 이 질문을 한 율법교사는 '바리새인'이며 역시 시험을 하려고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영생'을 질문한 것이 아니라 '큰 계명'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답변이 본문의 율법교사의 답변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4-40절)

만점 짜리 답안이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습니다. 옳다고 인정하셨지만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는 무뚝뚝한 답변에는 (선입견인지 모르지만) '맞지만 네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나 살아보렴'이란 냉소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듯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그럼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구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의 질문은 논리적으로 매우 타당해 보이는 심화 질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라면 그 이웃이 누구이고 어디까지 얼마만큼 사랑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다음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답변하신 말씀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조차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유명한 비유입니다.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제사장, 그리고 당시 성직자와 마찬가지였던 레위인들은 그냥 피하여 지나갔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천시와 멸시, 무시를 당하던 사마리아인이 보살펴 주었다는 비유입니다. 이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율법교사는 차마 '사마리아인'이라는 답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며 마지못해 답변을 합니다.

굳이 예수님께서는 왜 '제사장'과 '레위인'을 콕 집어 강도 만난 자를 피하여 지나갔다고 하셨는가를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시에 위선적인 행위를 많이 했던,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들은 그럴 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부족하거나 악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철저하게 잘 지키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9장을 보면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11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13절)이라 되어 있습니다. '거의 죽은' 강도 만난 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데 차마 만질 수 없었던 것일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 하더라도 돕느라 이래 저래 만지는 동안 죽게 되면 역시 시체를 만지는 것이 됩니다. 그들은 고귀한 '율법을 지키기 위해'라는 명분이 있었던 행동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명분이 있음에도, 질문한 율법교사 조차,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 답변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다... 이건 내가 답변한 옳은 이야기이다. 예수는 이것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예수가 든 비유처럼, 이웃이 되려다 또는 그 이웃을 사랑하려다 율법을 어기게 되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강도 만난 자를(시체일지도 모르는) 돕는다며 만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는 질문은 누가복음 6장에 나온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6장 9절)라는 질문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믿었던 자들에게는 패러다임을 흔드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질문의 답을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을 향한 제일된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는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 구문보다 죽어가는 자를 돌보는 것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질문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25절)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를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질문한 율법교사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율법 지킴이 아닌 진지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제일 되는 율법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자라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답변도 사실 저희가 알고 있는 '영생'과 '구원'의 길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개념과는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라는 말씀은 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 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 말씀을 듣는 율법교사의 마음 뿐 아니라 지금 이 누가복음의 말씀을 읽고 있는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결하고 거룩하라고 주신 율법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마음대로 조항들을 만들어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던 바리새인들처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나의 마음대로 재단하고 조작하여 나의 삶에 간섭과 나의 불편함을 최대로 없앤 최적화된(?) 교리를 마음대로 만들어 내서 믿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 화들짝 놀래며 믿으면 구원 받는다며??? 하고 당황하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그러한 모습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동의' 또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시고 그를 믿는 자는 영생한다는 사실을 단지 '아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마치 율법 조항을 하나하나 꿰고 있었을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 속에서 그 율법 조항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지 않았던 것처럼 믿는 다고 하면서 그것이 나의 삶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 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믿는 자 다운 행동과 삶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머무십니다. (이들의 오빠는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 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모시고 들어와 영접한 사람은 언니 마르다입니다. 그녀는 귀한 손님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영접하고 모십니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저 예수님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 언니를 도와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준비할 것이 많아 너무나 정신이 없던 와중에 이 모습을 본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 좀 보내서 자기 일을 좀 도우라고 이야기 해달라고 예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마르다가 듣기에 많이 서운할 것 같은 대답이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마르다의 열심은 사실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극진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모시는 것을 뭐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배를 드린 '눈물로 발을 씻고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 그 사랑을 칭찬하시고 죄 사함을 해주신 바가 있습니다. 그럼 칭찬을 받기에도 부족한 마르다가 이런 서운한 말씀을 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오신 것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르다의 영접과 대접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기에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귀한 섬김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좋은 대접과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열심이 정도를 넘어 여동생을 향한 질투나 원망의 감정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더더욱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마르다의 모습을 교회에서 발견하곤 합니다. 교회는 말씀이 전해지고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주로 보이고 들리는 것은 예배를 조금이라도 더 친절하고 편리한 환경에서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여러 서비스들입니다. 때로는 그것들로 인해 예배를 제대로 못드리는 봉사자들이 생기기도 하고, 누구는 일을 더 하고 누구는 일을 안 한다며 질투와 원망의 시선으로 다른 지체를 바라보는 일도 생깁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단 한 가지만 하더라도 좋은 것(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며 이러한 선택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가정이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고, 단 하나만 한다면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살면서 수많은 다른 것에 신경 쓰고, 고민하고, 염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지체들에게, 나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계속 보여주며 살아간다면, 나를 통해 보는 '예수를 믿는 삶'은 아무런 다를 바가 없는 인생일 것입니다. 하지만 매번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변화산의 구름속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을 순종하는 삶을 선택한다면 "빼앗기지 아니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이름
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공지 [공지] 스마트폰>파일첨부 기능 추가되었습니다. [2] 2014.09.12 관리자
공지 광고글, 광고성(교회포함) 글, 비방글,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사전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2014.07.18 관리자
1478 화살이 가르쳐 준 평안 2021.02.14 안예준
1477 솔개의 사랑 2021.02.14 안예준
1476 사탄의 참소 [5] 2021.02.14 안예준
1475 누가12장 베드로의 질문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2] 2021.02.13 김용재
1474 자본주의 경쟁에서 상처 받은 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2021.02.12 김용재
1473 헤세드의 사랑이란? -- 나는 세상에 싸움 붙이러 왔다 2021.02.11 김용재
1472 20210210 누가복음 11장 49-59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2] 2021.02.10 안봉균
1471 토요 기도회:사 27장1~13절 2021.02.06 김오진
1470 20210206 누가복음 11장 37-54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2] 2021.02.06 안봉균
1469 사랑 2021.02.05 안예준
1468 20210205 매일성경 누가복음 11장 27-36절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1] 2021.02.05 안봉균
» 20210202 매일성경 누가복음 10장 25-42절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1] 2021.02.02 안봉균
1466 20210201 매일성경 누가복음 10장 17-24절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1] 2021.02.01 안봉균
1465 누가복음 9장 --이런! 예수님도 짜증 내셨네요! 2021.01.31 김용재
1464 독생자 [2] 2021.01.31 안예준
1463 20210129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51-62절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 2021.01.29 안봉균
1462 누가복음 9장 -- 십자가 지기를 거부했던 유다 2021.01.29 김용재
1461 누가복음 9장 --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진짜 의미 2021.01.29 김용재
1460 누가복음 9장 -- 조국 교회가 알려주지 않는 예수님 2021.01.29 김용재
1459 20210128 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37-50절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2021.01.29 안봉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