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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8장에서 사도 바울은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지만 방문객과 비교적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때 골로새, 빌립보, 에베소 세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고 각 교회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나중 바울이 다시 로마의 감옥에서 갇혀 처형에 임박해서 적었던 디모데후서가 있긴 하지만, 이 세 서신을 사람들은 그래서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바울은 당시 가장 경제가 발전했던 교통이 발전했던 아시아 각 지역을 돌면서 예수님을 전했는데 골로새, 빌립보, 에베소 모두 이 지역에 속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의 교회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현재 소재지를 파악했는지 모르겠지만) 바울에게 문제를 알리고 해결책을 구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서신 모두는 그렇게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신이고 그런 맥락에서 서신을 읽어 보아야 제대로 서신에 나온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행전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11 제자를 이렇게까지 “차별”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됩니다. 11제자는 예수님과 같이 3년을 지냈고 같이 고생했는데 정작 아시아의 교회 성장에는 조그만 역할도 담당하지 못했습니다. 또 베드로, 야고보, 유다, 요한만이 신약에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1 제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이 신약 서신 대부분을 감당한데 대해 무척 섭섭하다거나 하나님이 바울에게 일방적으로 사역 대부분을 맡겨 자신들이 “역차별” 대우 받은데 대해 분노했다는 어떤 기록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어떻게 처신했는지는 사도행전 1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받아 드렸고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을 공식화시켜 주었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자신에게 혼이 났다고까지 적었습니다. 그냥 읽다가 "이런 세상에..."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 전통이 있었기 때문인지 신약을 정리했던 초대 교부들 역시 사도 바울 서신을 신약으로 채택하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울 만큼 하나님을 잘 이해하고 바울 서신만큼 하나님의 입장을 일관되게 그리고 명쾌하게 설명한 기록이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부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차별을 아주 편하게 받아드렸습니다. 9시에 입장한 사람이나 5시에 입장한 사람이나 다 똑 같은 품삯을 받아도 하나님이 그러시다고 하면 그게 맞다고 거기에 토 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아예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 자신은 자신이 그렇게 차별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는 줄 몰랐습니다. 그가 장님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교회를 핍박했고 사람들을 죽였고 고문했고 체포해 왔기에 그렇게 장님으로 인생이 비참하게 끝나도 사실 “공평”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 앞에서 그가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자신을 밝히셨습니다. 얼마 후 바울의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이 열리게 되었지만, 바울은 그때 “앞으로도 나를 위해서 그만큼 고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는 희안한 사역을 맡게 됩니다

흥미롭게도 그렇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던 바울 본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서신 디모데 후서를 쓰는 순간까지 자기가 쓴 서신들이 나중에 신약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세계 인구의 많은 수가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어서, 자기가 쓴 편지들을 읽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가택 연금 상태에서 급하게 써 내려간 에베소서가 2000년 후 조선반도 남서울 반포에 위치한 어느 교회에서 6개월보다 더 긴 기간에 걸쳐, 매주일마다 한 줄 한 줄씩 축조심의되어 분석될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에베소 서를 읽으면서 사도 바울이 2년 이상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알고 지냈던 에베소 교인들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편지를 적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온 것처럼 바울은 두란노 학교에서 강의하면서 많은 사람과 접촉했습니다. 헬라어에 능통했던 바울은 그들과 같이 식사했고, 말 안 듣는 아이 문제 때문에 골치 썩던 부모를 위로했고, 친했던 친구의 죽음으로 슬퍼했던 사람을 만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거기에는 사업 실패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집안에서 속 썩이는 아내 때문에 바울을 찾아온 남편이, 가정을 보살피지 않는 무책임한 남편 때문에 속이 썩어 들어가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모두 만났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제 상상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소위 신학적으로 바울을 분석하는 대신, 사람 냄새 나는 바울을 에베소서에서 맡을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고 느끼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좀 더 재미있게 되는 것처럼 인간 냄새가 나는 바울을 살펴 보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의미가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많았던 그 교회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의 어떤 사람이 문제를 상의하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혹시 남서울교회 교인 사이에서, 부서에서, 가정에서,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지역 사회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담임목사님이나 구역 교회 목사님에게 알리고 있나요? 알리고 싶으신가요?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이렇게 상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 가운데  바울과 친했던 그 누군가는 그렇게 교회에서 생겼던 문제들을 로마에 있던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바울이 그 문제를 접했을 때 에베소서 3장에 나온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잘 지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3장에 나온 기도는 그래서 꾸며낸 형식적인, 종이에 적어 미리 준비한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2년 이상 매일 매주 같이 교제하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이야기 나누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고 같이 길을 거닐며 산책하면서 같이 카카오토크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나누었던 사람들—그들에 대한 염려와 그리움이 배어 있는 기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온 기도지만, 그 배경을 짐작하지 못하면 우리는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만 기계적으로 분석하면서 겉핥기 식으로 그 기도를 분석했다고 생각하면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 올리면서 급하게 서신을 적었을지 모릅니다. 이 편지를 읽을지 모를 “사랑하는” 얼굴들을 스물스물 떠올리면서 한 문장 한 문장을 조심스럽게 적었을지 모릅니다. 그 어려운 에베소서 한 구절 한 구절은 그렇게 읽어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에베소서는 무척이나 “신학적”이고 “추상적”인 기록처럼 보이지만, 바울이 2년 이상 머물면서 교제했던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기초적인 지식, 다 아는 이야기를 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이미 나누었던 사람에게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긴 말 대신 짧은 표현으로 충분합니다. 긴 말은 이전에 이미 충분히 나누었으니까요. 에베소 교회와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성숙한 부부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농축된 대화가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그 결과 에베소서는 성숙한 교회와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낸 바울 서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바울도 몰랐고 에베소 교회도 몰랐지만 창세 전부터 비밀이었던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에베소서를 통해서 후세 사람들이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이 머리가 된, 예수님이 반석이 되신 교회는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교회는 유대교의 일부 분파였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지만 (기록자는 이방인 누가), 에베소서 서신의 독자는 이제 이방인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새롭게 바뀐 조직의 정체성이 제시되어야 했습니다. 이 새로운 조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같이 풀어야 했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던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기에 앞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던 것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예수님의 공동체의 의미를 누군가가 밝혀야 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에베소서가 쓰여졌습니다

그렇게 태동하고 있었던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예수님이 머리가 된, 예수님이 반석이 된 유기적인 조직이라고 바울은 에베소서 1~3장에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각자가 처한 일상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 보라고 에베소서 4~6장에서 바울은 권합니다. 알쏭달쏭하거나 적용하기 난감하거나 애매모호한 권면은 거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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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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