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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믿는 사람의 행위가 따르지 않아서 조국 사회에서 비난 받는다”는 지적을 너무 자주 듣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인데 저도 계속 그런 줄 알고 듣다가, 확인해 본 결과 몇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선 무슨 일로 비난 받는지 그 이유가 그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모세 율법이나 산상수훈 또는 야고보서 2장에처럼 성경에서는 잘못(죄)을 지적할 때 아주 구체적으로 적시합니다. 그냥 두리뭉실하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나온 야고보서 2장을 보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외모로 차별하고 무시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입는 것과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라고 말만 하고 아무 것도 돕지 않으면 당장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그들에게 심각한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2:16) 그런 말을 하는 야비한 부자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즉 예수 믿지 않는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야고보서를 읽어 보다가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조국 사회에서 믿는 사람들이 어떤 일로 비난 받는지요? 혹시 임금 체불인가요? 그런데 임금 체불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학위 논문 표절 혹은 시험 부정? 아주 자주 일어납니다. 목사 장로를 가리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자주 일어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탈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돈을 스리슬쩍 자기 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 자주 듣습니다. 남녀 사이 성적인 문란?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권면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인데도 조국 교회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아주 조용합니다. 정체와 내용을 알 수 없는 정의를 위해서는 직장에서 싸우고 사표까지 쓰라고 가르치면서도 남녀 사이의 성적인 문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외쳤던 야고보사도처럼 되려면 야고보서 2장에 나온 것처럼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 잘못 되었다고 지적해야 할텐데, 그렇게 해야 비난 받는 일을 알고 고칠 수 있을텐데 그냥 변죽만 울리고 지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합니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온 야고보서 2장 내용을 성경의 다른 부분과 연결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 속에 오신 예수님은 분명히 "구원 받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셨습니다. 또 구원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가지가 되어 열매가 열린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예수님의 이 말(=약속)을 야고보서2장에 적용하면 가난한 사람을 차별해서 멸시했던 부자들, "배가 고프세요, 목이 마르세요?" 그리고 전혀 도와주지 않고 말로만 행세했던 부자들은 | 예수님의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죽은 가지, 구원 받지 못한 인간이란 의미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열매를 성령의 열매로 설명합니다.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때가 되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법칙에 따라 믿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이를 막을 법이 없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애써 나서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갈라디아5:23).


그래서 혹시 누군가 신앙의 열매가 없다고 공격해 올 때 “나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가?” 이 질문 한 가지만 하고 거기에 집중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유명했던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스스로 무엇인가 해 보려고 발버둥치면서 노력 정말 마이 했습니다. 그러나 처절하게 실패했고 그런 나를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무언가 해 보겠다는 나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내 속에는 예수님이 살아 계셔서 나를 대신해 일하고 계십니다” (갈라디아 2:20) 바울은 이 이야기를 초대 교회 어디서든지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열매 맺기 위해 크게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고 갈라디아서 5장에서 신앙의 선배로 도움말을 줍니다. 누군가 “당신에게는 열매가 없네요”라고 공격해 오더라도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지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예수님이 저를 변화 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셨거든요!”라고 말하고 안심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혼자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기 바로 전 날 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너희는 나의 가지로 내게 꼭꼭 붙어 있어라” “절대로 딴 말에 흔들리지 말아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날 밤 “예배에 목숨을 걸어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에서 정의롭지 않으면 싸우고 사표 쓰고 나와라” 그런 당부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제발 나에게 붙어 있기만 해라, 그러면 열매가 열린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비결입니다. 은혜는 간단할수록 좋습니다. 복잡한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정말 간단한 말로 간단하게 우리 신앙의 원칙을 정리해 주셨고 사도 요한은 절대 다른 소리에 흔들리지 말라고 요한복음, 요한 1,2,3서에서 강조하면서 다른 이단에 대해 경계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행위 불일치 문제”를 지적하는 분들에게 보이는 아주 아주 흥미로운 현상들이 있습니다


왠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들은 몇 년이 지나도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님이 마지막 밤에 주신 부탁을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 부탁인데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도 요한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전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그냥 “행위가 부족합니다” “행위가 따르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아서 조국 교회가 욕 먹지 않게 해야 합니다”를 반복합니다. 무슨 일 때문에 욕 먹는지 명쾌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없이 뭔가 해 보려고 했던 과거의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현재 내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따라서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나는 예수님의 가지로 살고 있습니다” 는 원칙을 강조하는 분을 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또 더욱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조국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의 불일치 문제를 지적하는 분 가운데 아무도 사도 바울이 말한 갈라디아서 5장의 양선, 인내, 자비, 사랑, 희락와 같은 ‘내적’인 덕목을 강조하는 분은 없습니다. 대신 그분들은 십일조 바쳐서 성공하기, 예배에 목숨 걸기(하지만 코로나 사태 국가기관 지시 앞에서 완전 양순화), 40일 새벽 제단 쌓기, 세계 선교, 남북통일비전, 북한을 헷세드 사랑으로 용서하기 등 ‘외적’인 증거나 성과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다니엘, 사도 바울, 예수님, 사도 요한 베드로 등 신구약 성경에서 접하는 믿음의 인물이 그런 외적 성과를 강조했다는 기록을 찾기가 아주 힘듭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면 더더더더더더더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제 주위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는 주장을 듣고 고민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주변 사람을 너무 편하게 해 주는 분들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나온 막장 드라마 수준의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우주에 사는 분들인데, 그런 분들이 자신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뭐가 부족한지 물어 보면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해 묵은 논쟁을 지켜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태복음 25장이 떠 오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심판하시는 날 예수님을 잘 믿었던 분들은 자신이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 쩔쩔 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이 했던 작은 선행을 모두 기억하신다면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어라? 우리가 정말 그런 일을 했나요?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자기가 큰 일을 했다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이러 저러한 큰 일을 헀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단 한 마디 “나는 너를 모른다” “너희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그들의 말을 잘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옥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마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이미 습관이 되어 기억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 조국교회에 야고보 사도 같은 사람이 나타나 믿음과 행위의 불일치를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마 그 즉석에서 “예수 믿는다고 주장하는 당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구원 받은 사람 같지 않네!”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잘못이 있을 때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지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우리 남서울교회에 있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렇게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두세 사람이 모일 때 나도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잘못을 잘 지적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겼던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던 야고보 사도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외적으로 차별하는 것을 보고 당신들 지옥에 갈 사람들이네 라고 대놓고 경고했습니다. 헌금 많이 했던 (남서울 교회에서 “국가대표급” 죄인으로 규정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위선을 만천하에 공개했던 베드로 사도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위선을 공개적으로 꼬집었던 사도 바울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가 실수한 내용을 복음서에 그대로 적어서 후세의 사람들이 위로 받게 했던 사도 요한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요한이 복음서에 자신의 실수를 그대로 적은 것을 허락했던 베드로 역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구체적 행동이 따르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나온 야고보 사도의 말로는 형제가 배 고프면 식사를 대접하는 믿음이고 목 마르면 물을 주는 믿음입니다. 그냥 말로만 “아 배 고프시네요, 아 목 마르시네요, 아 …” 하면서 면전에서 립서비스를 하고 그냥 가버렸다가 야고보 사도에게 혼납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셨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말 없이 행동으로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누가 10장)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 2개월 교, 1주 세미나, 3년간의 신학교 과정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너무 충분하지 않을까요?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우리를 강권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바로 바울 자신의 체험, 즉 간증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면 왜 1~3장을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에 4~6장을 이야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11장을 이야기 한 다음 12장 이하를 이야기한 방식과 완전히 완전히 똑 같습니다. 바울은 4~6장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를 설득하기 전에 1~3장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먼저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1~3장에는 사도 바울 자신이 (신앙 공동체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체득한 하나님이 나옵니다. 바울 자신의 간증이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나 계시를 받았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특별 신학교를 수료했다고 떠벌리지 않습니다. 너무나 드라이하게 객관적으로 소개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바울의 간증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읽게 됩니다. 그 정도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너무 겸손했기 때문에 에베소서 1장 2장 3장을 읽다가 그만 숙연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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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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