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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없는 사회는 좋은 사회일까요? 교회는 경쟁 없는 목가적인 사회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야 할까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세상 경쟁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나요? 왜 그러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신 것처럼 창세 전부터 자본주의를 배격하라고 하셨을까요?

미국 시골 농촌 출신 연방 대법관 클레어런스 토마스는 몇 년 전 인터뷰에서 자신은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농촌은 너무 바쁘고 항상 배고프고 어떤 선택권도 없었다고 회고하면서 절대로 그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절은 경쟁은 전혀 없었지만 그 대신 매일 똑같은 지겨운 노동을 반복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이 없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런데 1970년 초 중국, 소련, 동독, 폴란드의 공산국가의 노동자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국가 통제 아래에 있었기에 경쟁이 없었습니다. 국가가 주는 일감을 끝내면 최소한의 동일한 배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최소한이었고 더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했고 원하는 직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경쟁이 없는 노동자의 천국을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희한한 일이 동구의 공산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일어났습니다

경쟁은 인간의 죄로 인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무너뜨립니다. 경쟁은 누구든지 자기의 능력으로 새로운 신분으로 수직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경쟁은 더 좋은 서비스와 제품을 제공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경쟁은 수구 기득권이 누리던 정치 권력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과 같이 전세계에서 꼴찌였던 나라를 10위권인 나라로 급부상시킵니다. 경쟁 때문에 세계 여행을 자유롭게 저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는 거짓에 기초해 나라를 만든 중국 베트남까지도 지독한 가난을 뒤로 하고, 그들이 그렇게 미워하던 경쟁 체제를 도입했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정한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가 있는데 “경쟁이 나쁘고 경쟁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런 주장은 Karl Marx가 자본론에서 예로 들었던 “공장 조립 라인의 노동자가 자신의 월급보다 더 비싼 제품을 자본가를 위해 생산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처럼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에서 나왔을지 모릅니다. Karl Marx는 공장 노동자가 자본주의가 가지고 온 경쟁 아래서 자본가 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아서 스트레스와 상처를 받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Karl Marx가 예로 든 조립라인 노동자가 받는 스트레스는 나중에 전혀 현실성이 전혀 없음이 밝혀졌습니다. 예를 들어 Apple iPhone을 생산하는 중국 노동자들은 행복합니다. 빈 자리가 나면 바로 채워집니다. Apple이 인도나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겨 갈까 중국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의 경쟁 논리가 문제의 근원이라는 설명은 현실성, 역사성, 구체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성도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이 좋았다고 창세기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온 다음 피조물까지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는데(로마서 8:18-22), 인간의 죄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더렵혀진 예가 많이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고 바벨탑 사건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보기에 좋았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모든 것 역시 나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 1:22에서 하나님은 (자본주의를 포함한) 만물을 예수님께 복종시키셨다 고 설명합니다. 즉 세상의 일부인 자본주의 역시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의 몸 교회는 자본주의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 나온 바울의 이 설명은 Karl Marx의 세상관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Marx에게서 영향 받은 사람은 세상을 자꾸 이분법으로 보려 하고 자기 권리를 주장하라고 가르치지만, 바울은 누구든지 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참고 일하라고 권합니다.  

Karl Marx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자꾸 (있지도 않을) 계급을 만들고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려고 하고 예수님을 쳐다 보는 대신 해라 하지 말라는 율법을 쳐다 보게 만들지만, 바울은 그런 율법보다 예수님을 아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더 이상 틀린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 분량의 믿음에 도달하라고 합니다 (4:13). 바로 "믿음의 장성한 분량"입니다. Marx에 영향 받은 사람은 자꾸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가 문제가 있다고 사람들을 선동하지만 바울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도며 따라서 나쁘지 않지만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에 의해서 사주 받는 자들에 의해서 문제가 된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에베소서 6장)

에베소 1장에 나온 바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설명은 아주 명쾌합니다. 세상 문제의 근원에는 인간의 죄가 있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아주 어렵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만물보다 더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문제다 (예레메야 17:9)

에베소서 1장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증표로 성령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갈라디아서 5장에 의하면 저절로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기 때문에 “차별하면 안 됩니다” 이런 말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성령님이 계셔서 일하시는데 성령님에게 실례가 됩니다. 성령님은 차별 금지가 아니라 자비, 희락, 양선, 온유, 절제 등 아주 수준 높은 덕목으로 꽉찬 인격을 만들어 낸다고 바울은 설명합니다

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망가뜨리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인간의 죄가 문제입니다. 계급이 문제가 아니라 계급을 이용해서 의시대고 오만한 자리에 앉아서 남에게 위해를 끼치는 소위 기독교인들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 수가 적어서 문제가 아니라, 정의를 외치면서 뒤에서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 수가 많아서 문제가 됩니다. 

문제의 구조를 파악해야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는데,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명쾌합니다. 인간의 죄 때문이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 문제를 자본주의의 문제라고 착각하고 자본주의의 폐해의 해결을 주장하면 마치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살해범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범인이 사용한 칼 때문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칼이 없었다면 분명히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칼 때문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칼입니다" 이렇게 답하면 될까요? 칼 만든 사람은 선한 목적으로 칼을 만들었지만 그 칼을 무슨 목적으로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건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칼에게 물을 수 있을까요? 그럴 때마다 자꾸 "칼"이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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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사진을 본문에 넣는 방법 file 2020.05.2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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