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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톡톡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란 단어가 갑자기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은 최근 몇 년 전인 것 같습니다. 그 바람이 교회에까지 불어 온 것 같은데, 성경이 기록된 몇 천 년 동안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차별보다 몇 백배 더 심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회사나 정부나 교회 조직 등 어떤 조직에서든지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차별적 대우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고 알려진 공산 국가에서도 당원이 되어야 출세하고 시집장가 잘 갑니다. 그런 나라의 차별 대우는 더 심하고 더 부당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차별하면 안 됩니다"를 녹음기처럼 틀어 대는 교회에서조차 집사/장로/권사를 평등하게 나눠서 2년씩 돌아가면서 원하는 사람마다 평등하게 나눠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고, 교회 직분자들의 보수를 완전 평등하게 나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는 어디든지 어떤 형태의 차별 대우는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했던 것 같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야고보서인데 아주 특별한 경우에 국한해서 차별 이슈를 다룹니다. 교회에 속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행색을 보고 심하게 차별했습니다. 부자 교인이 가난한 이웃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고 빚을 갚지 못하자 재판에 넘겼습니다. 또 당장 입을 것 먹을 것이 없는 성도에게 "아 배고프시네요 목 마르겠군요?" 이렇게 조롱하고 보내는 것을 본 야고보 사도가 화가 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는데, 신약 다른 기록과 합쳐 해석하면 “당신네  행동 보니까 예수님과 관련 없는(=죽은 믿음) 자들입니다” 라고 해석됩니다. 믿음이 죽었으니까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아주 쉬운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 구절에서 "당신 지금 재산 많다고 뻐기는데 죽으면 끝이야! 그렇게 살다 죽으면 지옥 갈 수 있어! 조심해! 언제 죽을지 몰라" 뭐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 어려운 야고보서를 쉽게 읽으면 그런 의미로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네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짧은 명령에 차별을 적용하면 “네가 차별 받고 싶지 않다면 너도 남을 차별하지 말아라”가 됩니다. 40분 설명보다 예수님의 이 말 한 마디가 저에게는 너무 쉽고 명쾌합니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저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면 차별하지 않으시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그 구절을 연상하고 판단 기준으로 삼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줄 알게 된다고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하셔서 그냥 그렇게 할뿐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저에게도 좋습니다 남에게 욕 먹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복음서에서 차별 비슷한 주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주제 예를 들면 “바리새인의 위선을 조심하라”는 여러 차례 강조해서 반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애석하게도 조국교회에서는 단 한 번도 그 내용을 다룬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가지가 된 사람이면, 예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소중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강조하신 내용에 신경 쓰게 됩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사도 요한의 말대로 우리가 예수님의 가지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고, 사도 바울의 말대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지체인 우리를 완전하게 쓰기 원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바로 그일을 위해서 즉 하나님의 양자 된 것을 기념하고 예수님이 머리가 된 교회의 지체로서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게 성령을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바리새인의 위선을 조심해라"는 듣지 못하고 예수님이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는 "차별하면 안됩니다"를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나 해서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이 성령의 열매와 관련이 있을까 해서 갈라디아서 5장22~23절을 살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 5:22~23)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에게는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이런 성품이 형성된다고 했는데 이런 사람이 남을 대놓고 차별할까요?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율법적인 요구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나에게 얼마나 어떻게 중요한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를 제대로 맺고 있다면 이런 열매가 반드시 꼭 열리게 됩니다. 누가 와서 "당신 열매가 없네" 라고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와서 "차별하면 안 됩니다" 라고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온 그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고 말하셨던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다음 구절에서 율법을 준수하고자 애쓰는 생활을 제발 포기하라는 의미에서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서 죽여 버렸다는 과장법을 사용합니다. 앞으로는 율법적인 삶을 강조하는 가르침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대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자”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내가 무언가를 혼자서 해 보겠다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이렇게 하십시오 저렇게 하십시오 라는 율법을 몇개 잠깐 잘 지켰다고)  잘난 체하거나 (그렇게 자랑해서 남을)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 (갈라디아 5:24~26)

성경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법이 율법을 지키는 법의 상위 법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상위 법을 위해 오셨고 이 상위 법을 따라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 사도 바울처럼 그런 율법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저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뀐지 200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상위 법이 왔기에 하위 법을 연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하위 법은 우리가 그때 얼마나 철부지였나를 확인하기 위해 가끔 들여다 볼 때 필요한 "몽학 선생"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 3:24)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치원에서 불렀던 노래와 놀았던 장난감들은 그 시절의 추억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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