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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톡톡



2000년이 되었고 저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문득 궁금한게 생겼습니다.
제 기억에 그 시절의 저는
딱히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이 없어도 어떻게든 10분정도는
기도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험기간에도 똑같이 기도시간을 가졌는데,
시험을 치고 성적이 나오면,
어디까지가 제가 공부한 대가이고,
어디까지가 제가 밤마다 10여분씩 기도한 대가인지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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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 원인이 사고이든 아니면, 질병 혹은 노화이든
이 모든 종류의 죽음에는 공통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현상으로 치부합니다.
사람의 논리로는 이 결론이 타당한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그런데 사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발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진짜 원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 현상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사형선고가 생물학적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망 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다른 무엇을 통해 가치를 증명하려하니까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꼭 율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아담아래 모든 사람은
이미 자기가 세운 법, 혹은 자기 양심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받는 형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 문제를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3500년 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공공연하게 법과 양심을 율법으로써 치환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잘 지켜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율법을 주신 목적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어두운 뒷골목에 찾아오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 마음안에 참된 해결책, 참된 가치에 대한 갈망을
키우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율법을 주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 2:6~10)


예수님이 언급하신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라는 것은 더 큰 열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대상의 다름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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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의>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열심히 빨리 뛴 토끼가 결승점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의입니까?
아니면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진중하게 걸어간 거북이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 의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대답을 들려드리지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하시겠지요.
"넋 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떡이 생기냐? 그게 의냐?"
어떻게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넋 놓고 있는 것과 같은 행위일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불의한 것 아닐까요?

왜냐면,
<의>라는 것은
존중받아야 할 이가 존중받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과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을 동일선 상에 두는 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으니까 가능한 발상 아닌가요?
진짜 넋을 놓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해서 산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생각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신 이가 살았다고 하면 산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5:38~42)


회당장의 딸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이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살으셨습니까?

사형선고를 내리시기도 하고,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시기도 하시는 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
그러니까 왜 굳이 죽으셨겠느냐는 것입니다.
3500년 전에는 굳이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율법을 주시더니
2000년 전에는 진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형선고를 내리시는 분이 거꾸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무엇을 바라시고 이렇게 하셨을까요?
.
.
.
예수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이 말씀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사형선고가 취소될 뿐만이 아니라,
그래서 나중에 죽은 다음 부활하는 건 당연한 거고
심지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거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기록된 맥락은, 그러니 용감하게 제자도를 행하라는 격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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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야 할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존재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할 존재를 순종하는 것이
기꺼이 그러하는 것이
이것 말고 다른 것에서 가치를 찾지 않는 것이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 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산 자들이니 장례식에 출입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진짜로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를테면 이런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공들여가며 다보탑을 쌓지 말아라.
내가 머리가 되는 교회가 되어라"


하나님이 우리 일상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시험의 장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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