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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톡톡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성경에는 많이 나옵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열심으로 공동체를 섬겼던 바리새인, 율법학자,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 따라 살며, 그들의 눈이 장님이어서 바로 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셔서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돌아오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끝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10~12장에서 예수님의 "헷세드"의 사랑은 위선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3장에서 18년 동안 허리가 굽어서 고통 받는 여인을 고쳐 주셨는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트집 잡았지만 (민수기 규정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이 시체가 될까봐서 접근하지 못했다는) 예수님은 그런 비상식적인 (자기네들이 만든) 규정은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라는 성경과 어긋나며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된다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병든 사람과 병들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자유롭게 해 주셨고 동시에 예수님 앞에서 규정을 들먹이면서 예수님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외 없이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셨고 저들이 도전해 올 적마다 항상 저들의 속 생각을 노출시켰고 꼼짝 없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던 그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메시아, 구원자,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끝끝내 부인했고 결국 폭도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잔혹한 복수극을 펼쳐서 인간의 죄가 위선과 돈 욕심이 뭉칠 때, 주식 투기나 주일 과외는 정말 새 발의 피라는 것을 독자들이 알 수 있게 누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국 교회에서는 이런 누가의 의도와는 달리 (1) 10장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착하게 살자" (2) 15장 돌아 온 탕자 비유를 "하나님은 무한정으로 돌아 올 때마다 용서해 주시는 착한 하나님이시다" 로 왜곡되게 해석하고 설명해서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 수 없게 만듭니다. 그 결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제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긴다" (로마서 10:17)라는 진행 단계에서 볼 때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된 믿음이 생길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믿음의 행위가 제대로 따르지 않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조국 교회의 문제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결과를 문제라고 계속 이야기 하는 문제 파악의 오류"라고 볼 수 있고, 문제의 핵심에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적어 내려간 것처럼 예수님에 대해 전하지 않음"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믿는 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예수님을 떠나 있기 때문이고 요한복음 15장에서 약속하신 "내 안에 거하라"라는 약속 안에 우리가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