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싶어요 내가 겪은 6.25 (1)
2017.10.30 16:46
사람들은 한 곳에 영구정착하기보다는 다양한 지역문화를 접촉하며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크리스쳔들도 어느 교회에서 누구와 만날 수 있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누고와 만나든지 그는<참 모범적인 신자>라는 말을 든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주인이 볼 때만 잘하는 척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라고 가르처주고 있다. 나는 점원생활의 초보에 있어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상점의 생활이 공부할 수 있는 보장이 되어 있어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일하는 번영상회의 가족이 되었다.
나는 1949년도에 번영상회의 점원이면서도 신집사 내외분의 추천을 받아 주일학교 교사는 물론 성가대까지 봉사하게 되었고, 설교대회에 청년회 대표로 출전하여 설교의 가능성이 있는자로 드러났다.그 결과 주일학교 아동설교를 많이 했고, 신집사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새벽에 불려나가 아동설교 도 가끔 했는데 하늘나라에 간 노권사가 그 원의 서무담당을 하면서 나의 아동설교를 듣고 장래 배우자감으로 나를 점찍엇다는 것이었다
나는 열심과 충성을 다하여 밈음직한 직원으로 일하며 주일날 오후에는 그 집에 있는 올겐을 교본을 놓고 혼자 연습을 했다. 일제시대 초등학교에서 음악공부란 두 시간 정도밖에 못했으니 음악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다 만 성가대의 경험만 가지고, 신집사가 자기 딸 가르치려고 사온 악기를 오히려 내 차지가 되어 올겐교본 한 권을 마스타하고 바로 찬송가를 4부로 연습하기 시작하여 대곡은 못치지만 찬송가 정도는 4부로 칠 수가 았었다. 그 올겐 처본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해병11연대본부 교회의 올겐 반주자가 될 줄이야! ,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다, 그 곳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수요일 저녁예배는 군목 대신 사병인 내가 담당하여 장교들로부터 일명 목사의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이 주일이었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는데 집사님들 이야기가 '오늘 새벽에 북한군이 38선을 무너뜨리고 동두천에 진입하였으니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되고 교회 일이 제일 문제될 성싶어 기가 죽어 있었다. 북한 공산당으로부터 수많은 애국자가 희생당한 것은 물론 그들의 정책은 믿음의사람들을 적대시하며 죽이는 자들인데 그들이 남한에 처내려와!! 다음 날 아침부터 동녁에 해가 눈물 흘리며 떠오르고 있었다.신집사는 본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피난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러면서도 미국에서 만주에 원자탄폭격을 한다고 했으니 그렇게만 된다면 감히 북한군이 더는 못 내려온다며 전쟁을 낙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는 만만치 않게 속전속결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일본으로 임시정부를 옭긴다느니 한강폭파가 되어 수백명이 일시에 한강에서 익사했다느니 사실적 난리의 이야기가 공포심을 가중시켰다.
나는 비단 등 고급 상품을 다 포장하여 낙안면 어느 깊은 산속 지인의 집에 맡기고 허드래 상품만 상점에 그대로 진열한 채 나 혼자 상점을 지켰다. 5일마다 장날이 되면 일상 물품들을 팔아 신집사 외 가족의 생활비 조달을 전달하기 위해서 산넘고 물건너 피난하고 있는 그의 가졷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은 그 길에서 죽창부대를 만나 검문을 당했다. 직업을 묻기에 농부라고 했더니 손바닥을 보고 거짓말이라며 내무서로 가자는 것이다. 만약 그곳에 갔다면 나는 죽었을 건데 마치 내무서에 나를 아껴주는 거물의 내무서원이 있어 "내무서 정창수 과장 동무가 나하고 무슨 관계인 줄 아세요/?" 라며 너무 당당하니까 그들은 "그럼 조심해서 가요" 라며 나를 놓아주었다.
산골짝이나 대밭에다 인민군의 차량, 무기들을 숨기고 , 낮에는 B29가 공중곡예를 하며 드르르 드르르 기관총사격을 하는가 하면 폭탄을 투하하기도 하여 애매한 죽엄들이 온통 피밭을 만들고 있었다. 이 마을 저마을에서 통곡과 슬픔이 .날빛마저 어둡게 하며 보도연맹들이 재수감되었다. . 보도연맹이란 평소에 대구폭동 등 도시 마다의 좌익(공산당)들이 자유민주주의 건설을 못하게 시위 데모, 테러를 하다가 채포되어 수감되었다가 공산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사회로 전향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겟다고 다짐한 그들을 석방시켰는데 그들을 보도연맹이라했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을 재수감했다. 일각의 생 명이 위태로운데 후퇴하는 정부가 그들을 그대로 두고 후퇴했겠는가. 남북간에 악순환은 마찬가지였으니 인민군이 북으로 또는 산 속으로 도피할 때 죽어간 동포의 수효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남침이 고조되어갈 때 교회가 인민군의 수용소가 되고 , 공동체의 예배모임을 못 갖게 된 것이 너무 마음아팠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반항하고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머슴들이 날개를 달게 되고, 남성동무동맹, 여성동무동맹이 조직 되어 한편으로 나도 공산당으로부터 피해자다. 나는 부모의 자연사로 고아가 되었지만 노정애 권사는 자기홀로 남아 여섯식구가 아무 죄도 없이 그들로부터 몰살 당했기에 그 가슴쓰림은 죽을때 도 가슴에 지니고 갔을 것이다. 노 정애 권사도 오우현장로도 고아로 자라 30대까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았다.! 그리고 오장로는 남서울교화에서 가방끈이 가장 짧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과분하게 저를 사랑하셨다. 첫째가 저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문제인 것이다
그런 와 중에 민청동맹에서 활동하던 친구 (나중에 의형)가 있었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민청동맹에 억지로가입이 되어 그들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와 나 두 사람이 스파이가 되어 나는 재생병원 원장과 한남대학 총장 아버님이신 이 시영 목사를 피신시켜 목숨을 구했고 , 국군이 수복해서는 신집사와 내가 내 친구의 신원보증을 서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아마도 전쟁이 발발한지 일주일이 좀 지나 순천 지방은 물론 대구와 부산 이외는 인민군이 다 점령했다. 인민군이 밤에 시가지에 입성한다는데 시민 전원이 원근 각처로 피난가서 그날처럼 시내가 적막한 것은 처음 느꼈다. 좌익사상자들은 인공기를 휘날리며 우리세상돌아왔다고 활개를 치고 다니며 눈에는 독기가서려보였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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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2017.10.30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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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재
2017.10.31 08:44
장로님 글을 읽으면서 이전에 제가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도 장로님이셨는데,
그렇게 빨리 서울이 떨어질 줄 예상 못 하고 피란 가지 못 하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투경찰대에서 근무하다가
인민군이 들어와서 이대 앞에 있는 얕은 산 동굴 속에서
3개월을 숨어 지내셨습니다.
당시 지금 이대역 근처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살고 있었는데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 하자마자 그들을 한강변으로 끌고 나가
모두 죽였는데 그 장면을 산 위에서 목격 하셨다고 합니다.
이북 실향민들은 엄지손가락 양쪽을 철사줄로 묶여
굴비처럼 마포 강변으로 끌려가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나중 서울에서 수복되고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아 드셨는데
그만 사람들의 육신을 먹은 물고기 와서 그랬는지 며칠 크게 혼났다고 합니다
많은 국군들은 3일만에 서울이 함락 되는 바람에 한강을 건너지 못했는데,
숨어 있는 곳에서 인민군이 머무는 곳을 몰래 소리 내지 않고
통과하는 국군 여러명을 보셨다고 합니다.
인민군은 서울 입성 후 바로
“인민의 적 부르주아를 몰아내자, 그들을 증오해야 한다”
라는 방송을 트럭을 몰고 다니면서 했다고 합니다.
인민의 적 모두 증오하고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아마 보도연맹 관련 해서 저들도 증오심에 불탔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보도연맹 관련 당시 남한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또 전쟁 전에 서로 평화롭게 대화를 하는 상태였다면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폭력으로 정권을 잡으려 했기 때문에
전쟁 전에 절대 그러지 못했고 결국 비극적인 참극이 결과되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후 서울이 수복 된 후에 그 장로님은 은신처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무슨 신분증이라도 있었나요? 라고 여쭤 봤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무슨 신분증이 필요하겠어 석달동안 햇빛 하나도 보지 못하고
머리 수염도 깎지 못하고 몰골이 흉측한 사람들이라면
그 자체가 신분증이지”라고 답하셨습니다
9.28 수복 직전 집에서 있다가 미군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 왔는데
마침 가족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지나갔다고 합니다
친한 친구 여럿이 학살당한 마지막도 목격했고
부역자들이 처형당하는 장면
남편 잃고 미군에게 몸 파는 양공주가 된 여인 등
전쟁의 참화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6.25 때 사상자는 마지막 6개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휴전 임박해서 고지 하나를 더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하다가
너무 많은 인명이 죽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전 미 국방장관 도날드 럼스펠드는
미군 3,300 명이 마지막 석 달 기간 동안에 한국전쟁에서 죽었다
는 사실을 자신은 결코 잊지 않고 있다고 회고 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또 작년엔가 장진호 전투를 장진호 전투에 관한 미국의 다큐멘터리가 나왔는데
미군 전사자 (실종포함) 5,900명 중공군 전사자 40,000~60,000명 (추정) 숫자를
보았습니다. 단 17일간의 동계 전투였는데, 정말 격렬한 전투였던 것 같습니다.
중공군 지휘자들은 미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해 12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아주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와중에 10만 명이 넘는 이북 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서 미군들 배를 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 번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방문 시 가졌던 기념비 행사에 참석한
많은 미국 한국전 참가 노인들은 그 자리에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더 비극적인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당시 흥남에는 10만 정도의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미군이 물자를 모두 버리고 배에 태워 나올 수 있었지만,
흥남 보다 더 큰 항구였던 진남포, 원산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각 20만이 넘었는데 미군은 도저히 그들을 배 되어 나올 수 없어서
3중 철조망을 치고 넘어 오는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쏘았다고 합니다.
자신들도 철수하기 급급한 상황에서 한국 피난민들을 싣고 갈 수 없었겠지요.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2분 교수님의 부모님들이
각각 진남포와 원산에서 탈출하셨는데 작년에 그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이 오면 바로 처형 될 사람, 영어 좀 할 줄 아는 사람,
아니면 뇌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의 가족 소수만이 탈출할 수 있었답니다.
그 추운 겨울에 떠나가는 미군 배를 바라 보고 있었던
수십만명의 피난민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섬짓해집니다
요즘 6.25 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내전"라고 표현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중립적인 표현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군대와 무기를 제공한 모택동과 스탈린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일입니다.
엄청난 참극이 발생했고,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가해자를
공의의 하나님이 용서하실 리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휴전선 이북 조선 사람들이 고생하는 큰 이유는
신명기에 나온 대로 조상들의 죄를 묻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자신의 6.25 체험을 들려주었던 장로님은 공산주의를
거짓 정의를 위해 증오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만약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는데 가해자가 없고
“이데올로기 때문에 발생한 내전이다”라는 맥빠진 주장만 한다면
가인의 범죄를 하나님이 묻는 것처럼 묻는 대신
"아벨과 가인이 타투다가 발생한 살인이다 이해하자"라면서
그냥 슬쩍 덮고 가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비극을 일으키고
회개하지 않는 원인 제공자를 그냥 놓아 두실 리 없습니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을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시킨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선택한 백성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하나님이십니다
너무 자주 듣는 용서의 심볼, 손양원 목사님도
만약 자신이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줄 알았다면,
아마 용서하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을 그렇게 실천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손 목사님의 위대한 정신은 저희가 기억해야겠지만,
모든 사람이 손 목사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주장은
상식을 넘어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그렇게 가르치는 분조차도 자기 집에 살인강도가 들어
가족 목숨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 강도를 용서하고 칼에 맞아 죽자고
강도에게 복종하자고 할 것 같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처신했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은 그런 처신을 놓고 감동하기 보다
상종하기 힘든 종교인의 괴상한 행위라고 평가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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