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매일 매순간 찾아오는 감사의 순간과 기적들,
묵상하면서 받은 은혜와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다짐과 감사하는 마음,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편지 등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QT나눔 가나안 여인이 만난 예수님
2021.02.21 06:42
예수님이 유대지역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왜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가셨습니다.
거기서 한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마 15:21~22)
이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일단,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 15:23~26)
사실,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선시하셨습니다.(마 10:5)
예수님은 유대인을 단순히 구속사의 한 통로로만 사용하셨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진정성 있게 사랑하셨고,
원래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누군가를 제외한 타인은 배제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떡을,,,아니하니라”라고 하는 말씀 안에는 분명 예수님의
진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표명에 대한 여인의 대답을 보시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7~28)
이 여인은 우리와 달라서 굉장히 현실적으로 예수님을 대면했던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들었고, 지금 찾아가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생각하기엔,
정말로, ‘자녀가 먹다 버린 부스러기’만으로도 모든 것이 해결 될 것 같았습니다.
또한, 막다른 골목이었고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왠지 예수님께 한 번 더 말씀을 드려도 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이런 마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반면,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습게 여겼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 여인의 이야기 바로 앞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7~9)
저는 외식하는 자들 때문에 화가 난 예수님이
이 여인을 통해 위로를 받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 여인의 대답을 들으셨을 때 아마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라오의 상 아래서 짐승취급을 받으면서
온갖 고초를 당했던 시절을 떠올리셨을 것이다. 그 때 느끼셨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과 애뜻함이 지금 이 여인을 통해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듯이 지금 이 여인도
자력구원이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그래서 이 여인을 내버려 두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사랑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6~17)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은 "차별하면 안 됩니다" "행함이 없어서 조국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와 같이 자동응답기처럼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항상 놀라게 됩니다. 이방인 여인이어서 그렇게 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자녀를 사랑해서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어머니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를 처음에 거절하셨던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그냥 퍼 주는 사랑으로만 알았던 "헷세드"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보여 줍니다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사랑은 전화 자동응답기에서 녹음된 똑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듣는 죽은 시체 부검이 아니라, 그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노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처음에 간절한 요구를 거절하셨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 여인의 입에서는 그 주변에 있던 바리새인, 율법학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진솔한 신앙 고백이 나왔고 그 고백을 우리가 오늘 읽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 덕분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냥 첫 대화에서 들어 주셨다면 너무 싱거운 장면으로 지나가서 그 이방 여인이 바리새인, 율법학자와 비교해서 얼마나 훌륭한 믿음을 가졌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겠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요구를 거절해서, 그녀를 시험에 빠드려서 결국 그녀의 믿음을 만천하에 알게 하셨습니다
많은 조국 교회의 선생님들은 야고보서를 잘못 이해하고 "행함이 없어서 조국 사회에서 기독인들이 비난을 받는다"로 잘못 가르치지만, 야고보서의 주제는 정확하게는 "살아 있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성도는 시험을 만나도 아브라함처럼, 욥처럼, 라합처럼 시험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이 행위로 증명된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속에 계시기 때문에 요한복음 15장에 나온대로 예수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열매로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1장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시험을 만나게 되더라도 이를 기쁘게 여기고 끝까지 참고 인내로 참으라고 했고, 야고보서 나머지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시험이 어떻게 찾아 오는지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혀를 사용해서 남에게 존경 받거나 남을 참소하려는 시험인데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까지 권고합니다
조국 교회에서 유행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조국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말이지만, 왜 행함이 없는지를 절대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즉 원인 분석을 하지 않고 결과만 지적하거나 결과를 원인이라고 착각합니다. 또 어떤 행함이 부족한지가 없는, 즉 목적어가 없는 문장이 되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요한복음 15장, 갈라디아5장에 아주 잘 나와 있고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사도행전 19장에 너무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에베소 교회에서 예수님을 잘 알린 결과, 그 교회에서는 믿음의 결과 행함이 일어났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 때문에 결국 사도 바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으며 바울은 에베소를 급하게 떠나야 했습니다!!! 언제 사도 바울이 "행함이 없어서 에베소 사회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게 거기에서 가르쳤다고 나오나요? 언제 "베풀지 않아서 에베소 교회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렇게 가르쳤나요? 언제 "우상에게 바치는 제물을 먹는 사람은 영혼을 팔아 버린 이방인과 같습니다" 이렇게 설교했나요? 그런 적 없습니다만,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가 바뀌었습니다